그는 20세기 초 새롭게 융합된 국제정치와 대한제국의 현상(Status Quo), 흐름(Trend), 또 선각적 예지(Farsighted Prediction)의 ‘틀(Frame of Thought)’에서 창조적인 독립운동의 투사로, 또 정상중의 정상 탁월한 전략적 지도자로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섭리’에 따라 준비된 이승만 박사의 성로(聖路)에서, 헤아릴 수 없는 굴곡과 고난의 맥락은 모세(Moses)의 성로(聖路)와 너무나도 상통합니다.
존엄한 섭리(攝理)의 도구로 쓰여진; 모세(Moses)의 성실한 성역(聖役)이 없었다면…이스라엘 민족의 해방도…!
또 이승만 박사의 성실한 믿음, 소망, 사랑, 애국, 애족에 기초를 둔 성역(聖役)이 없었다면… 우리의 ‘건국의 근간과 이념’인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 경제, 반공을 국시로 한 대한민국의 건국은 없었습니다.
마치 전능한 절대적 섭리의 과정(Process)을 통해 ‘선택되고 준비된 모세’의 성역(聖役)이 사생(死⽣)의 고난과 굴곡을 거쳐 ‘영광의 탈출’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성취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따라 선택, 준비된 이승만 박사의 성역(聖役), 곧 사즉생(死卽⽣)의 결단과 지혜로운 투쟁: 민주와 공산, 미국과 소련 그들의 편의 및 이기적, 정책적 추구로 말미암은 — 분열과 혼돈의 기로를 거쳐 — 영광의 건국 대한민국을 국민의 열광 속에 손에 손을 맞잡고 마음과 마음을 합하여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한학(동양) 학문의 성취 기록 : 5세때 천자문 완성; 12세때 사서삼경, 자치통감절묘
(중국 역대 왕조의 통치에 관한 책. 총 15권), 시전, 서전, 삼국지, 수호전, 서삼기, 전등신화 등의 지혜 역사서 소설 등을 읽고 인지능력 향상 사상을 넓혔다.
1905년 2월 32세의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하여 선교 장학금을 받으며 2년만에 학사학위취득,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학위 취득, 그리고 프린스톤 대학교에서 1910년 7월 “미국의 영향을 받는 중립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Ph.D. 정치학)를 받아 총 5년만에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마치는 천재적 두뇌와 열정을 재 표출 시켰다.
1948년, 73세의 이승만 박사는 5월10일 국회의원 총선에서 당선돼, 5월31일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됐습니다.
국회의장 연설후 “이제 나라 일을 의논하기전에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고: 기도문 전체는 페이지 26~31에 있습니다.)
이어 7월1일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며,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과,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전문 6조로 된, 즉 평화와 안전의 유지와 집단적 방위를 목적으로 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수난과 질곡의 세월을 영구적인 국방력 구축과 증진의 반석(盤⽯) 위에 놓아 주셨습니다.
대한민국의 초대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장엄한 업적 하나하나를 기술(記述)하기보다는 굵직한 그분의 공적을 정리하면: 정부 수립의 정통성과 함께 반공정책; 의무교육; 농지개혁의 실시; 해양 평화선 설정; 한미 상호방위조약체결; 국가보안법 제정; 반공포로 석방; 근로기준법 제시; 남녀 평등권 및 참정권 보장;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략과 외교적 지도력; 전쟁 후 복구 및 경제 안정화…등은 업적 중의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99 이승만(24세)은 고종 폐위 음모(독립협회 사건)에 가담,
체포되어 감옥 생활 시작(1월 9일),
1월 30일 탈옥 시도를 실패하였다.
7월 평리원 고등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한성 감옥에 5년 7개월간 수감되었다.
-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
- 역사서 신간서적 수백권을 탐독했고 미국의 유명한 잡지 Out Look 등 정기 시사지를 읽었다.
- 청일전쟁사, 세계사, 서유견문도 정독했다.
- 1901년 2월부터 1903년 4월 13일까지 제국신문 논설을 썼다.(무능한 관리들의 행정 비판등 대한 민중을 계몽)
- 자신의 논설집필 중동 전기 본말을 청아전기 번역 하와이에 출간 되었고
- 독립정신(대한제국 개화·민족주의로 체계화되는 전환점을 제공한 근대화 운동의 성서다)
- 영한사전 편찬도 시도함.
- 학교를 만들어 죄수들에 시대적 요구인 개화 교육과 소년수들에게 영어, 지리, 문법, 성경 등을 가르쳤다.
- 40여명의 죄수와 옥리까지 기독교로 개종토록 전도했다. 그중에는 이상재 회장 ‘신간회’을 맡는 등
독립 운동계의 지도자이며 이승만의 열렬한 지지 자 로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될때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45년 9월15일, 라디오를 통해 울려 퍼지던 이승만 박사의 육성이 생생합니다. “우리는 뭉쳐야 합네다. 우리는 뭉쳐야 합네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바로 그 육성이 대한민국 국민과 해외동포, 북녘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울려 퍼져 마음판에 새겨지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단결과 뭉침의 중심’은 대한민국의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의 ‘시종(始終)의 성로(聖路)와 성역(聖役)’ 속에 존재합니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도 이 박사님은 자신보다는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피를 흘려서는 안돼! 부정을 보고도 일어서지 못하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국민이 원한다면…그만 두겠다”면서 대통령 직 사임성명을 4월26일 발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90년의 삶(1875-1965)을 마감하고 선종(善終)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경외하서면 순종의 진리를 알면서도 ‘왜(Why)’ 라는 심상(⼼想)의 애정을 갖기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 모세(Moses)도 우리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도…인생의 여로에서 ‘명(공) 과 암(과)’ (즉, ‘밝고 위대하고 창대한 업적이 있으며 또한 이에 상반되는 적은 어두운 과실의 부분이 상존함’) 을 깨우치지 않을수 없읍니다.
이제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하며 역설적 변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삶에 높은 경의와 찬양을 담아 엄숙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외침의 소리가 쓰여진 글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과 국민, 삼천리 반도 아름다운 강산에 또 전 지구촌에 충만 하소서…! 감사합니다.